1996년 5월, 고려대 학생들이 이화여대 운동장에 들이닥쳤다. 일순간 “민족고대”를 부르짖는 함성이 광장을 메웠다. 인파는 금세 5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서로에게 딱 붙어 스크럼을 짰다. 축구 응원가인 “오레오레”를 “고대고대”로 바꾸어 부르며 단결력을 과시했다. ‘기차놀이’를 하고 ‘막걸리 찬가’를 불렀다. 고려대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이들은 흡사 고장 난 게임 캐릭터 같았다. 이 집단폭력은 12년 전부터 계속되어왔다. 함성과 발 구르는 소리, 모래바람. 이화여대 여성위원장은 원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캠코더를 들었다. 폭력의 현장이 담긴 비디오는 후에 방송사와 고려대 총학생회 본부에 전해졌고 고대생의 죄명은 ‘난동’이 아닌 ‘성폭력’으로 정정되었다.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이 사건을 돌아봤다. 해설 서한나 1996년 5월, 이대 난입한 고대생들
이대 여성위원장은 가운데로 가
떨면서 캠코더를 들고 찍었다. 12년간이나 이어진 고대생들 폭력
여성을 그저 쟁취 대상으로 본
당시 대학문화 상징적으로 보여줘
고려대 남학생 4명이 고대생임을 나타내는 빨간 모자를 쓰고 이화여대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다. 이성을 잃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이대 총학생회는 이 사진 속 얼굴들을 고려대 학칙에 따라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주동자 7명이 처벌받았다.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제공한 사진이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훼방과 폭력을 멈추지 않는 고대생들의 모습. 이화여대 총학생회 카메라가 잡았다. 고대생들끼리 모여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모니터 밖에서도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아수라장을 생생히 담은 사진이다. 이 얼굴들은 후에 증거자료가 된다.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제공했다.
500여명의 고대생이 이화여대 축제에 난입했다. ‘민족고대’를 외치며 등장한 이들은 ‘막걸리 찬가’를 부르고 있다.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캠코더로 촬영한 영상이다. 젠더 미디어 <슬랩>에 공개된 영상 화면을 캡처했다.
이화여자대학교(이하 ‘이대’)의 축제 대동제에는 초대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다. 1985년 이전 대동제에 초청받은 고려대학교 학생(이하 ‘고대생’)들은 많지 않았다.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담을 넘고 들어가기도 했다. 1996년 5월, 고대생이 대거 난입해 축제를 방해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저지하던 이대생이 다쳤다. 고대생은 저항하는 이들에게 “사람을 이따위로 대접하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환경공학과 4학년 학생의 오른팔이 부러졌다. <한겨레21>은 1996년 6월20일 이 사건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기사를 보면 당시 고대생의 시각을 알 수 있다. 다음은 86학번 고려대 출신으로 대학 시절 그 학교 축제에 갔었다는 회사원의 말이다. “프티부르주아 분위기가 강한 신촌에 민족고대 문화를 심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고대생은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위치한 신촌에서 중산층 의식을 느끼고 상대적으로 노동자 의식이 있는 자신들이 그 분위기를 고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의 고민이 그들에게만 주어진 것도 아니거니와, 당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고대생은 중산층을 교육하겠다며 남성의 머리채를 잡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대생을 가르치겠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허위의식’이다. 80년대 운동권 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심도 있게 해부하는 책인 <오빠는 필요 없다>의 저자 전희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성들이 자원과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제 체제는 ‘타자’의 범주를 창조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다.”(223쪽) <오빠는 필요 없다> 당시의 고대생은 남성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대생이라는 타자가 필요했다. “어쨌든 찍어야 되겠는 거예요.” 이대 여성위원장이 한가운데서 캠코더를 들었다 훈육을 자처한 고대생들은 축제 때마다 찾아왔다. 햇수로 12년째였다. 1996년 5월, 축제 마지막날 여성위원장 조혜련씨는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캠코더를 준비했다. 그는 이성을 잃은 무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캠코더를 꺼냈다. 2019년 10월, 밀레니얼 젠더 미디어 ‘슬랩’(slap)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소회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총학생회 여성위원장이던 조혜련씨가 캠코더를 들고 난입 현장을 촬영하는 모습이다. 이 증거를 기반으로 가해 주동자 7명을 찾아냈다.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제공한 영상을 젠더 미디어 <슬랩>이 훗날 다시 공개했다. 영상 화면을 캡처했다.
“원 안에 들어갔는데, 무섭더라고요. 오금이 저린다고 하죠. 그 영상을 찍고 나서 방송사에도 전달했고 그 증거를 기반으로 7명의 (주동) 학생을 찾아냈어요.”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가해 현장을 담은 비디오와 함께 요구사항이 적힌 공문을 전달했다. 축제 한달 뒤인 6월5일, 이대생 200여명이 고려대 교정에 모여 규탄집회를 열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이화광장에서 ‘고대생들의 집단난동 근절을 위한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해방이화’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변재성 기자가 촬영했다.
<한겨레21>(1996년 6월20일치)은 집회를 취재하러 온 고대 출신의 언론사 기자와 여성학 강사의 발언 내용을 기사에 담았다. “성폭행이란 생식기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편의 자주성을 억압하는 행위다.”(김성아, 32, <내일신문> 부설 성교육센터사무국장)라는 발언이 이어졌다. 이대 학생들이 사건을 “성폭력”으로 명명하자 고대생들은 반발했지만 12년간의 폭력의 핵심에는 ‘성별 권력’이 있다는 것으로 결론 났다. 가해행위가 ‘난동’으로 축소되지 않고 ‘성폭력’으로 정정되자 고대생은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냐”고 불평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여성 대상 폭력에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말은 현실의 어떤 것도 바꿔내지 못한다.
결국 고대생은 이화여대에 사과문을 남겼다. “저는 지난 이화여자대학교의 대동제에서 이화광장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난동을 부렸던 96학번 학생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화여대 학생이 이를 읽고 있다. 가해자는 고려대의 이름에 먹칠했다는 점을 후회하고 있다. 이 사진은 1996년 6월 <한겨레21>에 실렸다. 박승화 기자가 촬영했다.
사건 발생 20일 뒤, 컴퓨터통신에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덮어주는 아량도 필요한 것 아니냐. 마지막까지 가면 당하는 사람은 다른 보복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좀 해라. 잘못했다고 했잖느냐” 등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1996년 6월 <한겨레21> 기사는 그들이 과거에서 멀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건 해결까지 가는 동안에 지켜보는 이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고려대 총학생회 쪽에서 가해자를 징계하는 대신 자원봉사하게 해달라며 ‘이해’를 권하고 있다. 1996년 7월3일. <한겨레>는 이후 징계에 대한 논의까지 성실하게 추적했다.
1996년. 7월3일치 <한겨레신문>을 보면, 고려대 총학생회는 “이대 쪽이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하는 만큼 관련 학생들을 여성단체에서 자원봉사를 시켜 속죄하도록 하는 게 어떻냐”며 학사징계 대신 자원봉사를 요구했다. 가해자 쪽에서 입맛대로 처벌을 요청하는 모습은 마치 성범죄를 저지른 가수가 “음악으로 보답하겠다”며 분별 없이 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윤민화씨는 6월20일치 <한겨레21> 인터뷰에서 “학칙에 의거한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대생이 이대생에게 가한 12년간의 폭력은 여성을 주체로 보지 않고 쟁취의 대상으로 보던 당시 대학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르주아 의식을 교육하겠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여자 대학에 난입해 여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여성이 언어를 가지고 지식을 쌓는 것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반증한다. 혹자는 가해자 중에 여성도 있었음을 들어 이 사안이 성별 이슈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우르르 몰려온 고대생 중에 여학생도 있었는데 이게 어째서 성별권력에 기반한 성폭력이란 말이야?’ 조금 더 들어가보자. 여성도 가부장제와 공모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부장제와 공모하게 된다. 이들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이 아니었다. ‘민족고대’로 대표되는 남성문화를 내면화한 상태였다. 약자는 때로 현실의 모순을 직면하는 데 실패해 강자와 공모하게 된다.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먹는 일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가해자 중에 여학생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해 결국 자신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로 가부장제가 복잡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여성위원장이었던 조혜련씨는 고대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진짜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고대 여학생들로부터 온 편지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동안 자신들이 눈감고 있던 문화에 대해 말해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고대와 이대의 싸움이라기보다 고대와 이대 여학생들이 남성문화에 대해 저항했던 사례가 아니었나 합니다.”(<슬랩> 인터뷰 중에서) 실제로 대학의 주체는 남성으로 대표되었다. 당시 고대생은 연대생과의 학벌주의에 기반한 경쟁의식 속에서 이대생이 저들을 차별하는 것 같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었다. 고대와 연대로 대표되는 남성 간의 파워게임이 이화여대를 배경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고대생은 응원가인 ‘막걸리 찬가’ 가사를 다음과 같이 개사해 부르기도 했다.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양보 못 한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한겨레21> 페미니즘 특강에서 설명한 내용은 이 사건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남성의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서 일어난다. 약자의 몸은 늘 강자에게 전쟁터로 제공된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처럼. 미국 남성이 한국 여성을 강간하면,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 싸우는 게 아니라 미국 여성을 강간하는 판타지를 꿈꾼다.”(2017년 10월16일 <한겨레21> 제1183호) 그들이 폭력의 대상으로 이대생을 삼은 데에는 이러한 생각이 깔려 있었다. (나만큼) 똑똑하고 (나만큼) 배운 (사람) 여자를 견딜 수 없다. 이화여자대학교라는 여성들의 배움터를 자신들의 싸움터로 상상하고 연세대로 대표되는 다른 남성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실감하는 존재감이란 얼마나 작고 무른가.
이화여대 총학생회 카메라에 잡힌 고대생이다. 사진을 찍는 현장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전해진다. 두 남학생은 담배를 피우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년 뒤인 지금까지 악습의 한 장면으로 박제될 것을 모른 채.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제공했다.
2017년에는 연세대학교의 응원가사가 논란이 됐다. 다음은 ‘Woo’ 가사의 일부다. 고대의 ‘막걸리 찬가’와 닮았다. “고대 못생겼어 일단 못생겼어/ 계속 못생겼어 고대 쒜이낏/ 이대한테 차이고 숙대한테 차이고/ 여기저기 차이고 차이고 또 차이고” 연대에 따르면 고대생이 못생겼기 때문에 이대와 숙대 학생들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인데, 남대생을 주체로 삼았다는 것이 같다. 해당 가사는 여성혐오 논란 이후 개사되었다. 2016년 이후 온라인에서는 “왜 안 만나줘”는 상징적인 문장이 되었다. 여성이 데이트해주지 않는 것을 억울해하는 남성들의 대표적인 행태가 유머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와 결혼에서 좌절이 예상되는 시기에 남성의 분노는 강렬해진다. 여성에 대한 후려치기와 여성 간의 구분을 병행하며 ‘내 여자’가 될 ‘개념녀’를 찾아다니고 내 여자가 되어주지 않을 여자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그들이 페미니스트를 향해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욕인 이유는 그것이 투사이기 때문이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두 학교의 남대생들은 이성의 인정을 통해서 세워지는 자존감을 공유한다. 그동안 고려대와 연세대의 여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누구도 누군가의 애인이 되기 위해 입학하지 않는다. 이성에게 선택받는 것 외의 방식으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들은 신남성이 되었을까. 1996년 7월3일에 발행된 <한겨레>를 보던 중, 500여명의 가해자 사이에 법학과에 재학 중인 스무살 학생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유독 성범죄에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한국의 판결들과 연결되었다. ‘소라넷’과 ‘엔(N)번방’ 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 세계 최대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에게 내린 1년6개월의 징역,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자인 조두순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알림을 주어 가해자를 피하도록 하는 결정까지. 최근 디지털성범죄 관련 양형기준이 조정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성폭력에 관대하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사건을 축소하고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은 범죄를 장난으로 왜곡한다. 남성이 중심이 되어온 역사 안에서 범죄와 처벌이 한데 엉켜 이어지는 것이다. 사회가 남성의 침범권을 옹호하는 동안 여성은 살아갈 자유를 잃었다. 최근 트위터상에서 “24시간 동안 세상에서 남자가 없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 말에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밤에 산책, 혼자 산책, 하이킹, 밤에 잘 때 창문 열어놓기, 택배 걱정 안 하기, 택시 안심하고 타기. 혼자 여행하기…. 성별 권력의 존재는 남자에게 침범할 권리를, 여자에게는 피할 의무를 주고 있다. 남자는 원한다면 여자들의 공간에 접근할 수 있고 접근을 거절당하면 화도 낼 수 있다. 이화여대 대동제 사건부터 2020년 현재 여성커뮤니티에 대한 공격에 이르기까지 침범의 양상은 다양하다. <한겨레> 박다해 기자가 진행한 페미니스트 인터뷰 시리즈 ‘판을 바꾸는 언니들’ 중에서 유독 비혼과 비출산을 이야기하는 회차에 악성댓글이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떤 이들은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여자를 참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가 많다고 해결이 불가한 것은 아니다. 고대생 집단폭력 사건 이후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될 거라는 것을 당시의 가해자들이 알았을까. 사건을 타고 넘어 등장한 여성들은 그간 ‘난동’이라는 이름으로 사건의 함의를 축소해오던 것을 “폭력”으로 정정하는 데 성공했다.
1996년 6월20일치 <한겨레21>에 고대생들의 난동을 지탄한 <이대학보> 한 페이지가 실렸다. 사진설명에는 윗옷을 벗어두고 욕설을 외쳐댔다고 쓰여 있다. 사진 속 첫번째 남성은 손가락 욕을 하고 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대동제를 지키기 위해 결의대회를 하는 모습이다. 이화여대 여성위원회가 촬영했고 1997년 7월19일 <한겨레>에 실렸다.
고대생 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대생을 중심으로 생겨난 ‘들꽃모임’은 후에 ‘영페미니스트’로 불리게 된다.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 영영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한 것이 연상된다. 영페미니스트와 영영페미니스트, 이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미래를 기획한다는 점이 닮았다. 건강과 자기계발, 자산축적에 대한 야망은 원동력이 되었고 여성 간의 연대를 지지대 삼아 하루하루를 바꾸어낸다. 미성년자 성착취 불법영상물을 공유한 텔레그램 ‘엔번방’의 실체를 최초로 추적하고 알린 이들은 언론도 검찰도 아니었다. 2명의 여자 대학생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이었다. 이들은 취재와 동시에 경찰에 신고를 하고 수사를 도왔다. 디지털성범죄가 멈출 때까지 취재를 이어가고 싶다는 ‘추적단 불꽃’은 올해 여성가족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2016년, 이화여대는 훗날 대통령 탄핵을 불러올 사건을 만든다. 이화여대 학생과 교수는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딸인 정유라씨와 관련된 학사 비리를 해결하라는 뜻을 담아 집회를 열었고 학내 의사결정구조 민주화를 촉구했다. 고대가 ‘민족’을 부르며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이대는 폭력의 장면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렸다. 해방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흐름은 20년 뒤 시간의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대와 고대는 모두 이름을 남겼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1996년 6월27일 <한겨레21> 114호에 실린 사진. 사과문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민족고대’를 여전히 강조하는 모습이다. 이대 학생이 사과문을 읽고 있다. 박승화 기자가 촬영했다.
1996년 6월20일 <한겨레21>에 당시 윤민화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인터뷰가 실렸다. 그는 “이번 사건은 명백하게 남성적인 힘의 문화가 가져온 성폭력 행위”라고 설명했다. “관련 학생의 명확한 처벌과 공개사과, 손해배상 등”을 요구했다. 이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의 과정으로 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태호 기자가 인터뷰했다. 사진은 박승화 기자.
▶ 18화 해설자인 서한나는 2014년부터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다루는 여성주의 잡지 <보슈>(BOSHU)를 발행하며 대전에서 여성글쓰기모임 ‘규방글방’을 운영합니다. 2020년에는 여성 간의 다양한 관계를 담은 책 <피리 부는 여자들>을 공동집필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권력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각별한 애정이 있습니다. 현재 <한겨레> 오피니언면에 ‘서울 말고’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와 관련한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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